요즘은 좀 우울감이 내 일상을 물들이려고 막 시동을 거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 잠식은 당하지 않았다.
이번 학기 건축 수업 과제는 주변에서 건축물 사진 두 개를 찍어서 건축 구법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내 전공은 컴퓨터공학과인데 들어 보고 싶어서 특별히 신청한 수업이다). 아무래도 프랑스 살았을 때 한국인인 내게 인상 깊어 보이는 건축물을 많이 보았어서, 교수님 허락 받아 유학 시절 찍은 사진 중 골라서 쓰려고 했다.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앨범)를 연 거지.
프랑스에 산 5년 동안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지도 않았지만, 사진 속 내 모습은 전부 얼이 빠져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 보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를 전혀 고민하지 않은 듯한 모양새였다.
머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듯, 온몸을 잡아 먹을 것처럼 커다랗고, 다리는 마치 무릎 아래로는 잘린 것처럼 짧막했다. 그나마 위의 사진에서는 발이 잘려 있기 때문에 다리 짧은 게 가려졌으니, "잘 나온 사진"에 속한다, 처참한 나의 기준에서는 말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 삶을 보내면 그나마 본인에게 어울리는 헤어 스타일, 옷 스타일, 표정, 말투, 심지어는 주변에 두고 싶은 사람의 부류 등을 알아가고 찾아가기 마련인데, 철저하게 내 내면에 매몰되어 있었던 나는, 흡사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관리 안 되고 있는 조형물처럼 살았다. 외로운 5년이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시라. 프랑스는 그렇게 차가운 나라가 아니다. 항상 친절하고,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들은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대놓고 "저 눈 나빠요"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다가와서 인쇄 크게 된 시험지가 필요한지 물어보는 선생님(르망대 열역학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도 계셨으니...! 내가 그런 관계를 둥지처럼 받아들이고 정착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아상이 있어야, 사람들과 교류할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도 그 자아상에게 내릴 수 있다. "너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보이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해야 해."
그런데 스스로가 누군지를 모르겠으니 곧 그때그때의 기분이 나 자신을 정의해 버렸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마 엄청 예측도, 이해도 힘든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같이 새해를 보내자고 불러서 밥도 같이 먹었는데, 시끌벅적함 속에서 먼저 가 보겠다고 갑자기 자리를 뜨거나,
같이 장을 보러 가자는 룸메에게 난 됐다고(룸메가 엄청 기분 상해했었다) 거절을 하거나,
프랑스에서의 첫 2년을 같이 보낸 같은 과 친구에게 오랜만에 온 문자에 불편해서 답장을 안 하거나,
그런 식으로 인연의 기회를 그냥 흘러 없어지게 놔뒀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면, 내가 매번 그냥 그들 스토리의 재료에 불과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을 할 수가 없는데, 저들은 "이 자리에는 애인을, 이 자리에는 추억할 친구를, 이 자리에는 사무적인 관계의 사람을" 하고 정해 놓고 그냥 적당한 자리에 인형놀이 하는 것처럼 나를 앉혀 놓는 것만 같았거든. (참 삐뚤어졌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다르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글을 쓸 때면 마치 모든 것을 내가 "이제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지금은 좀 더 성숙해지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는 하는데, 솔직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변하고 싶은가? Yes.
어떻게 변해야 할지를 모르는가? Yes.
20살엔 변화하고 싶어서 좋아하지도 않고 (시각 장애로 시야가 좁아서) 할 수도 없는 축구 하겠다고 선배들 부르는 축구 현장에 갔다가 너무 못해서 욕만 먹기도 했고,
24살엔 프랑스에서 6살 어린 애들이랑 친구해 보겠다고 먼저 달려가서 인사도 하고, 먼저 연락처를 묻기도 했다.
30살엔 세상엔 나를 알리겠다며 실시간 10만 명이 시청하는 정치 유튜브에 나가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나,
이 모든 것은 내가 감당할 그릇이 안 돼서 변화의 계기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계속 시도 중이다. 앞으로도 내가 안 해 본 이상한 것들을 많이 해 보면서 변화를 모색할 것이다.
로봇청소기가 내게 그런 감명을 주었지. 구석구석 치우겠다고 계속 경계면을 부딪히며 걸레질 하고, 청소기 돌리는 그 모습이,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알고 싶으면 계속 부딪혀야 하는 거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