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나도 살면서 손해배상청구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있다. 정말 무서웠다. 손해배상청구서에는 "네가 회사에 손해를 끼친 건 수천 만원, 사실 그 이상인데, 내가 너를 애정했던 시간이 있으니 특별히 고려해서 얼마만 청구하겠다"라고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높은 금액이었지만, 예정된 공연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에 대한 대가였다.
여러모로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손해를 봤다고 적어 놓은 항목들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읽었을 때 대체로 정당했고, 내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내 개인적인 감정", "그 감정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나에 대한 개인적인 탐구", "음악과 사람을 보는 내 개인적인 시선에 대한 개인적인 분석" 같은 것들 뿐이라, "이래서 그렇게 행동했어요" 하고 나 자신을 방어할 논리적인 무기가 부족했다. 무슨 말을 해도 내 말이 활자로 옮겨졌을 때에는 타인에게는 미성숙한 헛소리로밖에 읽히지 않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나의 모든 것이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회에 표출되었을 때는 꽤나 명백하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갈린다. 사회에 존재하는 나라는 사람은 더 이상 온전한 개인으로만 있지 않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어느 정도의 이중성을 갖고 살아야 한다.
- 옳건 그르건 그냥 내가 느끼는 것이 곧 내가 되는 날것의 상태
- 옳은 것을 옳은 방식으로 주장해서 법적인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 정제된 사회인의 상태
나는 이걸 굉장히 늦은 나이에 아주 우연하게 위 사건을 계기로 배우게 되었다.
민희진 이야기
모든 인간은 크고 작은 비전(vision)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전은 "현재를 벗어난, 미래의 어떤 순간에 대한 청사진"을 말한다. 나는 민희진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갖고 있는 비전의 스케일이 크고 또 선명한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비전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눈과 상상력, 그리고 뜨거운 의욕이 빚어낸 지극히 개인적인 산물이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장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상상력이라는 마음의 눈으로만 관찰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이 같은 것을 상상하고, 서로의 마음에 공진이 일어나고, 긍정적인 시너지가 일어나서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협동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기적적인 일인데, 민희진의 첫 기자회견을 들어보면, 민희진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이런 기적이 썩 잘 일어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니,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할 수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 하고 본인의 창조성이 어떤 선입견으로 점철된 환경에 의해 좌절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그녀의 말에서 느껴진다. 나는 —요즘의 여론과 결이 맞을지는 의문이지만— 민희진의 예술적인 창조성을 응원한다. 그녀 같은 사람이 있어야 세상에 새로운 게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이 일을 하는 도중에 나와 같은 청사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끌어모으고 나를 구속하는 사람들은 밀어내면서 조금 더 본인의 비전이 숨쉬기 편한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모든 인간이 갖고 있을 자연스러운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민희진의 경우 그 과정이 상당히 공격적으로 전개되었던 모양이다.
뉴진스 이야기
나는 민희진과 뉴진스가 겪었을 어떤 부당함에 대한 경험은, 그것이 문자로 옮겨졌을 때 대중의 마음에 와닿는지와는 무관하게 분명히 실존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목격했던, 분명히 무언가를 목격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의 내면에서 나름대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재판 결과를 보면 그 부당함의 모양새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엔 부족했던 것 같다.
아티스트는 결국 지극히 개인이 되고 싶은 개인일 뿐이다. 그런데 일상을 그렇게 살았다간 "너 사회생활 안 해 봤냐", "너는 뭐 사회 밖에서 살아가는 신이라도 되냐" 소리를 들으니, 그 개인성을 음악, 미술, 춤 같은 추상적인 수단을 이용해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아티스트조차도 결국은 타인으로부터 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가는 사회인이다. 예술도 결국 사람이 하는 활동이지만, 동시에 그런 사람의 한계를 승화시키는 게 예술이기도 하다.
개인과 사회인의 정확한 경계선에서 씨름하다가, 결국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압박감을 못 이겨 소속사로 돌아가게 된 뉴진스. 뉴진스가 뉴진스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한편으로는 뉴진스라는 그룹을 기획한 사업가들의 덕이지만, 그와 비등하게 뉴진스가 충분히 뉴진스 자신이 되었던 덕도 있다. 잘 보이기 위해서 지나치게 자기자신을 왜곡시키지 않은 자연스러운 표현에 대중이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 순수한 표현력을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성숙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한 청자에 불과한 나는 그저 내 귓구멍에서 내적 댄스 두둠칫 유발하는 좋은 음악을 앞으로도 계속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뿐. 시간이 지났을 때 남는 유일한 것이 음악 뿐일 테니 온전히 음악에 집중해서 이 시간을 버티면 좋겠다.